AM8시, 한 모금
사진첩에 저장된 사진을 보다가 많이 보이는 이미지 중 하나가 '커피'와 관련된 것이었다.
때로는 친구와 여유롭게 또는 급히 어디론가 오고 가다 그리고 일과 일 사이 잠깐의 시간에 홀로 즐긴 커피 등 다양한 순간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 많은 커피의 모습과 장소 중 드로잉으로 남겼던 커피는 여유로운 시간에 마시거나 종류에 따라 어울리는 잔에 마신 커피가 아닌 하루 중 가장 갈 길이 바쁜, 하루의 긴장을 조금도 내려놓지 못했던 시간에 마셨던 것이었다. 어쩌면 그 순간이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붙들릴 수밖에 없었던 현실, 분 단위로 쪼개 살았던 긴장감이 함께 각인되어 그러한 것 같다.
30대 중반까지 병원에 가면 공통적으로 들었던 말 중의 하나는 수면 시간을 늘리라는 처방전이었는데 오래 천천히 그리는 작업의 방식은 규칙적이고 꾸준한 시간이 필요했고 특히 20대에는 학업과 일 그리고 작업, 세 개의 사이클에 시간 배분을 하기 위해서는 줄일 수 있는 시간이 잠밖에 없었다. 그 당시 음악, 미술학원 아르바이트로 필요한 생활비와 작업비를 마련하기에는 한정적이라 몇 개의 일을 병행했는데 과외와 소그룹으로 진행하는 독서-토론-논술 강의였다. 보통 논술하면 입시가 가까운 수험생들을 떠올리게 되는데 우리나라에서 사교육이 뜨거운 곳 중 한 곳에서 7세부터 고3까지 독서와 토론 그리고 논술을 단계별로 준비하는 곳이 있었다. 수업 과정에서 돌출된 이론과 개념은 다시 각 과외 선생님들께도 공유되면서 학습의 전반적인 케어가 이뤄지는 곳이었다. 몇 해 전 'SKY 캐슬'이라는 드라마가 방송되었을 때 친구들에게 연락이 왔었는데 혹시 작가와 아는 사이인지, 드라마 소재를 제공했는지 등 잠시 웃픈 상황을 겪었다.
7세부터 중등까지는 미술과 음악을 전공하는 선생님들과 협업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는데 가령 식물과 관련된 주제에는 각종 시청각 자료를 기반으로 관찰 드로잉과 토론 수업이 진행된다. 학생들은 관찰과 토론을 통해 꽃잎이 겹치는 규칙을 찾아내고 식물에서 찾은 나선형 배열을 관찰하며 자연스럽게 자연을 닮은 수열인 피보나치 수열 개념까지 접근하게 된다. 물론 저학년에 속하는 학생들은 자신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수열과 관련된 내용인지 알지 못한다. 아이들 언어로 이야기한 것이 어떻게 개념적으로 정리되어있는지 알려주고 수열에 대한 감각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다. 토론 수업에서 나온 피보나치 수열은 각 학생들 수학 담당 선생님들께 연락이 간다. 이제 학생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서 개인의 흥미 정도와 학습 진도에 맞게 수열 개념을 수학의 언어로 다시 경험하게 된다. 물론 이때도 억지로 개념을 주입하거나 암기하지 않는다. 당장 수열이 적용된 문제를 풀어야 하거나 외워야 하는 개념이 아닌 경험이 쌓여서 수열 과목을 배울 때 혹은 적용이 필요한 순간에 상기시켜 응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수업의 목적이었다. 경험과 기억 그리고 응용까지 메타인지를 키우는 과정인 것이다.
댄 브라운(Daniel Brown)의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소니에르가 죽으면서 남긴 메시지에도 피보나치 수열이 등장한다.
13-3-2-21-1-1-8-5 (작은 수부터 순서대로 쓰면 1-1-2-3-5-8-13-21)
O, Draconian Devil! (애너그램 철자를 바꾸면→ Leonardo da Vinci)
Oh, Lame saint (→ The Mona Lisa)
처음, 소개받고 수업을 시작할 때는 7세부터 초등부 담당이었는데 수업 주제와 필요한 개념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쉬운 언어로 다시 풀어 설명해야 했기에 많은 양의 수업 준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부족한 잠을 달래고 수업을 가기 위해 늘 한 손에 커피가 들려있었다.
7세 수업 시간에, 한 아이가 내가 들고 온 커피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지 그 아이가 속한 조 만큼은 주제 토론이 아닌 커피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었다. 그날 수업 주제가 있더라도 각 조에서 다른 이야기가 활발히 진행될 경우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게 했다.
커피에 대한 소비가 늘어가고 대중가요에도 커피에 대해 은유와 비유로 이뤄진 수많은 가사가 있지만 그날 일곱 살 시선에서 커피에 대해 말한 한 문장은 위로와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A, B, C, D 총 네 명이 한 그룹으로 앉아있었고 그중 A, B 두 아이는 커피에 대해 이야기하고 C 아이는 두 아이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있었고 D 아이는 대화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그날의 시각 자료를 보면서 가끔 세명의 친구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의 모습을 짧게 요약하면,
A : 우리 선생님도 커피 많이 마시는 것 같아. 우리 아빠가 그랬는데 커피 많이 마시면 건강에 안 좋다고 하셨어.
B : 왜 안 좋아? 우리 엄마, 아빠도 많이 드시는데.
A : 우리 엄마가 물처럼 커피 많이 마시는데 잠도 잘 못 자고 그래서 병원 다니셔. 차에도 항상 커피가 있어.
B : 그럼 우리 선생님도 병원 갈 수 있겠네?
이때부터 나를 한 번 보고 소근소근 또 나를 보고 소곤소곤 걱정하는 대화들이 오고 갔다.
한참 후에 그 대화를 경청하던 C 아이의 한 마디에 나를 비롯해 A, B 두 아이의 걱정된 대화도 멈추게 되었다.
C : 얘들아! 어른들에게 커피란 우리에게 코코아와 같은 거야.
뜻밖의 순간에 나의 현실을 공감받고 이해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의 감동은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스트레스에 지친 어른들이 달콤한 음식과 커피를 습관적으로 찾듯이, 어릴 때부터 해야 할 공부도 많고 각자의 개성보다는 비교가 일상화된 교육 시스템에서 아이들도 달콤함이 주는 위안은 끊을 수 없는 순간일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코코아는 많이 먹으면 치아가 썩고 건강에 좋지 않다는 말이 뒤따르는 동시에 언제 마실 수 있는지 타협점을 찾는 음식에 속할 것이다.
이화여대 정문으로 나와 2호선 이대역 방면으로 걷다 보면 왼쪽에 스타벅스 1호점이 있는데 횡단보도를 건너 직진하면 골목 사거리를 마주하게 된다. 그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두 번째 좁은 길부터 떡볶이 골목이 시작되었다. 떡볶이를 좋아했던 친구들과 골목 처음부터 끝까지 한 집 한 집 맛을 보며 단골집을 찾던 기억이 엊그제 같다. 초등학교 책상 같은 작은 테이블이 4개 정도 있었고 줄을 서서 기다리다 먹곤 했다. 이대 재학 중인 친구가 있었는데 떡볶이를 먹고 NaRaYa 매장에 들려 가방을 보고(그 당시 스타벅스 건너편에 있었다. 누빔 형식으로 만들어진 천 가방인데 큰 리본이 달려있고 다양한 색상과 모양이 있어 인기가 많았다.) 스타벅스를 가자고 했다.
그해 여름, 처음 맛본 프라푸치노와 마끼아또는 그동안 마셨던 커피에 대한 모습과 가격에 대한 인식을 바꿈과 동시에 많은 질문들이 떠오르게 했다. 며칠 고민하다가 커피가 만들어지는 과정, 유통과정, 가격 책정 기준 등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시간을 쪼개어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스타벅스가 생긴 이후 프랜차이즈와 개인 커피 전문점들이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했고 아르바이트 채용 공고를 많이 볼 수 있었다. 하루에 한 잔은 가격에 상관없이 원하는 커피를 마실 수 있었기에 어떤 날은 메뉴에 없는 음료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그렇게 또 아르바이트가 늘고 잠이 줄었다.
커피 전문점이 많이 늘었지만 회사가 밀집한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을 제외하고는 아침 일찍 문을 여는 곳은 드물었다.
그래서 종종 이른 아침 집을 나설 때면 맥도날드에 가서 커피를 사곤 했는데 2005년부터는 라바짜(Lavazza) 원두를 사용하기 시작하여(현재는 아라비카(Arabica) 원두를 사용) 가성비 좋은 커피를 맛볼 수 있었다. 보통 패스트푸드 매장에서는 최신 유행 가요나 옆 테이블의 대화가 신경 쓰이지 않아도 될 정도의 볼륨 있는 음악이 울리곤 했는데, 이른 아침에 들린 그곳에는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로 기타 선율이었다.
마음에 닿는 음악이 들리면 그 장소에서 발길을 옮기기가 어려운데, 가장 갈 길이 바쁘고 하루의 긴장감을 온전히 내려놓지 못한 시간에 만난 음악은 나를 잠시 테이블에 앉게 했고 종이컵에 인쇄된 사람의 모습이 컵 홀더 사이로 묘하게 가려진 순간을 기록하게 했다.
마치 1968년에 발표된 펄 시스터즈의 <커피 한 잔> 속 가사의 한 소절처럼 분과 초를 세고 있었던 그 아침, 그 장소, 그 순간이었다.
"8분이 지나고 9분이 오네 1분만 지나면 나는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