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미술, 음악,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즐겨 보셨는데 특히 꾸준히 디자인 잡지를 보셨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글을 모를 때는 잡지 안에 실린 그림을 즐겨 보았고 좀 더 커서는 글도 읽으면서 그 시간을 즐겼다. 옛날 잡지에는 한자가 많아서 수십 번 물어보아도 늘 처음처럼 알려주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2015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겨진 사물들을 보고 있으면 그때의 상황과 장면이 오롯이 기억 속에 그려진다. 또한 여전히 난 그 사물들과 함께 지내며 영감을 받고 있다.
1976년에 창간된 《월간 디자인》을 2000년 초반까지 보시면서 메모하시던 아버지의 모습과 주말이면 지금은 사라진 동네 서점과 레코드 가게에서 책과 음반을 사러 다녔던 기억은 성장기에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특히 가끔 시내로 놀러 갈 때 들렸던 회현 지하상가 오디오 가게에서 아버지와 사장님이 대화를 나누실 동안 스피커 옆에 앉아 음악을 듣던 기억은, 그때의 소리와 온기 그리고 두 분의 표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여전히 책장에 꽂혀있는 1976년 6월 28일에 발행된 잡지는 년간 구독료 10,000원, 권당 1,500원이 찍힌 그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표지가 사라지고 변색되었지만 과거 유행에 대한 흐름과 그 현상에 대한 필자들의 견해를 읽는 시간은 또 다른 발상으로 인도한다.
Chloé
베이지빛 바탕에 빨강과 파랑의 가는 줄무늬가 있는 순모의 개버딘이 소재인 이 앙상블은 풍성한 느낌을 주나 이런 경향이 이번 77년 춘하 시즌의 유행이 될 것으로 본다.
패션 잡지가 흔하지 않던 시절에는 디자인 잡지에서 패션 광고 외에도 유행에 대한 디테일한 기사를 볼 수 있다.
종종 다시 잡지를 보다가 아버지께서 스크랩하거나 메모한 부분을 볼 수 있는데 가령 왕골공예에 대한 기사가 실린 페이지 사이에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꿈 Le Rêve> 그림이 같이 놓여 있다. 왕골공예 작품에 담긴 형과 색 그리고 피카소의 <꿈 Le Rêve>그림을 함께 비교하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궁금하다.
Pablo Picasso
그림이란 처음부터 이미지가 되는 것도 아니며 정착되는 것도 아니다.
제작을 하다 보면 점점 떠오르는 상념을 좇아서 완성했다고 생각하면 또다시 앞이 나타나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변화해 가는 것이다.
그림이 그것을 보는 사람을 통하여 비로소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낮에 거두어들이면 색조가 변하기 때문에 야음을 이용, 단시간에 거두어들여 하룻밤 이슬을 맞히고 양지바르고 통풍이 좋은 곳에 널어 충분히 말린다. 연두색이던 것이 하얗게 탈색되어 눈같이 흰 상품이 되는데 이때 실패하면 색조가 나쁘고 염색이 고르지 않게 된다. 왕골은 방등산이과의 일 년생 초본이다. 수확한 왕골의 정제는 30분쯤 물에 담갔다가 빨리 건져내야 부드럽고, 염색은 염기성 염료를 마치 옷감에 물들이듯 하는데 염료의 분량과 배합은 오랜 경험을 요한다.
어쩌면 더 오래되었을지도 모를, 70년대부터 부모님이 사용하시던 왕골 함지는 여전히 내가 사용 중이다.
기쁜 일이 잇달아 일어나기를 바란다는 뜻의 기쁠 희[喜]+기쁠 희[喜]가 속자로 새겨져 있다.
바느질함에서 액세서리 보관함 그리고 지금은 작업실에서 소소한 간식거리를 넣어두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종종 '독자 엽서'를 작성해서 우편으로 보냈는데, 90년대 중 후반에 특별 선물 이벤트가 있었다.
그 당시 최신 카메라와 자전거(?)와 같은, 가장 큰 선물이 자동차(?)였던 것 같은데 각 한 명에게 주는 당첨 확률이 0.000001% 이벤트라고 생각했지만 하얀 여백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생각을 적고 색연필로 예쁘게 꾸며서 보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만약에, 혹시 만약이라도 당첨이 된다면 카메라이기를 바라며 하지만 단 한 명에게 준다는 현실을 새기며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날
당첨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그중에서 정말 원했던 카메라가 당첨되었다.
그렇게 나의 첫 필름 카메라, '삼성 KENOX Z60'이 왔다.
디지털카메라가 나왔던 시절에도 오랫동안 즐겨 사용했고 조만간 다시 필름을 넣어보려고 한다.
카메라 뚜껑이 열리는 소리, 필름이 감기는 소리, 촬영이 끝난 필름을 꺼내어 작고 검은 동그란 통에 넣을 때 뚜껑이 맞물리는 소리, 사진이 나오기까지 기다리는 시간, 어쩌면 우리는 과정이 점점 생략된 경험들에 익숙해지고 있다. 하지만 빠름이 일상화된 사회 속에서도 여전히 누군가는 걷는 중이다.
어떤 날은 사용하지 않아도 늘 '곁'에 있는 사물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림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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