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친한 동생이 "100원 있어요?"라고 물어보았다.
당근 거래를 하기 위해 길을 나서다 문득 물어본 것이었다. 순간, 질문 자체가 낯설게 다가와 몇 초간 멍 했던 기억이 난다.
잠깐의 멍함을 뒤로하고 혹시 예전에 물건을 사면서 동전을 받아 넣어두었던, 잊고 있던 동전이 있을까 봐 허겁지겁 지갑 구석구석을 찾아보았다. 동전이 지갑에 없는지 오래되었지만 그것이 어느 순간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카드가 일상화되었고 현금결제가 필요하면 바로 계좌이체로 생활하다 보니 물성을 지닌 돈의 존재가 낯설고 어색해지고 있었다.
분명 사라진 화폐가 아닌, 현재 사용되고 있는 사물이 과거로 기억되고 있었다.
초등학교 앞에는 정문을 기준으로 앞에는 3개, 건너편에는 2개의 문방구가 있었는데 문방구마다 공통적으로 문 밖에 매달려 있는 사물들이 있었다. 주로 훌라후프와 공처럼 집합과 묶음이 효과적인 사물들이었는데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형과 색을 찾는 과정은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있었다. 특히 눈이 있는 돼지 저금통의 경우 눈 위치의 미묘한 차이와 오랜 시간 밖에 걸려 있어서 빛의 노출 여부에 따라 한쪽 눈이 바래, 나를 바라보는 돼지의 표정이 묘하게 다르게 느껴질 때 한참을 그 앞에 서 있다 온 기억이 난다.
어쩌면 그렇게 데리고 온 돼지 저금통이 '한 푼, 두 푼' 저축하는 습관과 즐거움을 알려준 첫 번째 사물일 것이다.
화폐가치가 점점 하락하고 그 형태가 달라지는 가운데 은행에 돈을 넣어두기보다는 부동산 그리고 주식과 코인 같은 인플레이션을 따라잡을 수 있는 투자를 권유하는 사회에서 집 어느 한 곳에서 조용히 자리 잡고 있는 돼지 저금통에 동전을 넣는다는 행위는 어떤 의미를 줄까.
요즘은 저금통에 뚜껑이 있어서 언제든지 열고 닫아 돈을 꺼내고 사용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돈을 꺼내기 위해서는 칼이나 가위로 돼지 저금통 배를 열어야 했다. 동전이 저금통 바닥으로 떨어질 때, 동전이 모이는 정도와 무게에 비례해서 소리가 변했는데 그 소리의 변화가 주는 긴장감과 즐거움을 잊을 수가 없다. 요즘 인터넷 뱅킹에서도 '동전 모으기'가 있는데 처음 이 기능이 나왔을 때 동전이 모이는 정도에 따라 소리 지원이 된다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전이 저금통 바닥으로 떨어질 때, 짧고 둔탁한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언제, 왜, 어떻게' 이 돈을 사용할 것인지 고민이 깊어졌는데 이 세 가지 질문은 따로 떨어져 오거나 한참의 간격을 두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늘 동시에 찾아오고 동시에 대답해야 할 것 만 같았다. 마주친 돼지 눈빛에서 그래야지 이 저금통을 열 수 있다는 무언의 압박을 느꼈다. 그래서 소리 정도에 따라 고민의 고민은 거듭되었다.
종종 초등학생을 위한 책을 즐겨보는데 학습 만화 중에서 《Why?》는 다양한 분야 속에서 생활하면서 일어나는 과학적 원리를 쉽게 풀어주고 있어서 궁금증이 많은 나에게도 즐겁고 유용했다. 《위대한 발명의 실수투성이 역사》도 편집과 구성이 아쉬운 책이었지만 호기심과 궁금증에 대해 가볍게 알아갈 수 있었다. 이곳에 돼지 저금통의 유래가 담겨있었는데,
중세 시대, 접시와 냄비 같은 그릇들은 값비싼 금속 대신 경제적인 '피그(pygg)'라는 점토로 만들어졌다.
여분의 동전이 생길 때마다 가지고 있는 점토 항아리에 넣었고 이 항아리를 피그 뱅크 또는 피기 뱅크라고 불렀다.
그로부터 200년 300년이 지나는 동안 사람들은 '피그'가 도기 재료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잊었고
19세기에 '피기 뱅크'를 주문받은 영국 도공들이 돼지(pig) 모양 저금통을 만들었다.
2002년 여전히 돼지 저금통을 사용 중이었는데 생일에 친구가 새로운 돼지를 키워보라고 선물해 주었다. 호주 시드니에서 만들어진 해피앤코라는 캐릭터 회사에서 디자이너와 콜라보한 저금통이라고 들었는데 다행히 저금통 아래 뚜껑이 있어서 아직까지 살아있다. 장수할 것 같다.
꽉 찬 동전을 꺼내기 전의 돼지 저금통 모습을 드로잉으로 담아보았는데 제목을 정할 때 처음에는 <When, Why, How> 혹은 <When-Why-How>로 할까 고민하다가 '언제, 왜, 어떻게'라는 질문이 동시에 왔던 긴장감과 고민을 제목에서도 담고 싶어서 붙여 사용했다.
결코 간격을 두거나 떨어질 수 없는 질문들은 손쉬운 인터넷 뱅킹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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